티스토리 뷰

카테고리 없음

전봉준:녹두장군

Lavender100 2025. 8. 7. 08:39

목차



    반응형

     

    구한말 동학 농민 혁명을 이끈 혁명가이자 항일운동가.

     

    전봉준은 백제(百濟) 개국공신(開國功臣) 환성군(歡城君) 천안 전씨 시조 전섭(全聶)[14]의 후손이며, 서당이나 한약방 등을 운영한 것을 보면 조선 말기 몰락한 중인 또는 양반 집안으로 보인다.

     

    30대 때 동학에 들어가 접주가 되었고 1890년대 초반에는 운현궁에 있으면서 2년 남짓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있었던 적도 있다. 이에 연이 닿아 동학농민운동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이 밀사를 보내어 전봉준과 밀통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19]



     

    동학 농민 혁명

    이 무렵 유명한 탐관오리였던 고부군수 조병갑[22]의 횡포가 극심했다.

    조병갑이 모친상을 당한 후 부조금으로 2천 냥을 거둬오라는 요구에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 마을 대표로 나서 항의하다가 화가 치민 조병갑에게 곤장을 맞아 죽는 일이 벌어진다. 이후에도 조병갑의 횡포는 계속되어 자기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우는 비용을 백성들에게 전가했는데 만석보라는 이름의 저수지를 백성들의 노동력을 동원해 건설하고 사용료도 백성들에게 강제로 징수하여 착취하며 지방 토호들에게도 돈을 빼앗는 등 점입가경으로 치달았다. 결국 분노한 전봉준은 이때부터 나라를 개혁하겠다는 뜻을 품게 되었는데 1894년 농민 1천여 명을 이끌어 민란을 일으켰으며 만석보를 헐어버리고 관아를 습격해 빼앗긴 곡식을 되찾아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23]

    조선 정부에서는 부랴부랴 조병갑 등의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새로이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임명한 후 안핵사 

    이용태를 보내 잘못을 시정하겠다고 하였는데 사태를 추스르기 위하여 파견된 이용태 또한 극심한 횡포를 부렸다.

    전에 왔던 새로운 군수 박원명은 할 수 있었던 일이 없어 별 도움은 안 되었어도 농민들을 달래주기라도 했지만 이용태는 전혀 아니었으며 농민들을 고문하고 처형하는 행패를 부렸다.

     



    사후

     

    1954년 천안 전씨 문중에서 이평면 조소리에 전봉준을 추모하는 사적비를 건립하였고, 1960년부터 복권 노력이 추진되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가 동학 농민 운동을 동학난으로 서술하던 것을 농민 운동으로 고쳐서 싣도록 하면서 동학난은 농민운동으로 격상되었고,

    전봉준에게 씌여졌던 역적 누명 역시 벗겨졌다.

    1981년 한국청년회의소가 전주시 덕진공원에 전봉준의 추모비를 세웠다.

     

     

     

     

     

    설명:

    https://namu.wiki/w/%EC%A0%84%EB%B4%89%EC%A4%80?from=%EB%85%B9%EB%91%90%EC%9E%A5%EA%B5%B0

     

    전봉준

    구한말 동학 농민 혁명 을 이끈 혁명가 이자 항일 운동가. 생애 동학 혁명 이전 전봉준은 백제(百濟) 개국

    namu.wiki

     

    반응형